조선 중기 정치사에서 가장 뚜렷한 변화는 사림의 등장과 그들이 주도한 붕당정치의 형성이다. 조선 전기에는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하며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지만, 중기 이후 유교적 이상을 내세운 사림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권력구조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사림은 처음에는 공공성과 도덕성을 내세우며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내부의 노선 차이와 학문적 분열, 인사 갈등으로 인해 붕당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조선 정국을 수백 년간 혼란에 빠뜨리는 당쟁 정치로 귀결된다. 이 글에서는 사림의 등장 배경과 정치 진출, 사화로 인한 고난, 붕당 형성과 분열, 그리고 정국혼란으로 이어진 조선 중기의 정치 전환기를 다층적으로 살펴본다.
사림의 정치 진출과 사화의 연속
조선 중기 사림의 부상은 단순한 정치세력 교체가 아니라,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는 사상적 도전이었다. 사림은 지방의 향촌 사회에서 성장한 유학자 출신 인사들로, 중앙 권력을 독점한 훈구파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강한 비판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은 성리학적 명분론과 도덕 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우며 정치 참여를 본격화했고, 성종 대에 들어 중앙 정계에 다수 등용되며 정치적 기반을 확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 진출은 기존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훈구파는 왕권을 뒷받침하며 실리 위주의 정치를 추구했으며, 이는 사림의 이상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졌고, 사화(士禍)라는 이름의 참혹한 정쟁이 반복되었다. 무오사화(1498)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그의 문인들이 숙청당한 사건이었으며,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해 사림을 탄압한 사건이다. 기묘사화(1519)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시도와 이에 반발한 훈구파의 정적 제거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을사사화(1545)는 명종 즉위 후 외척 간 권력 투쟁에 사림이 휘말리며 대규모 숙청이 이뤄졌다.
이러한 사화는 사림에게 큰 피해를 안겼으나, 오히려 이들은 정치 권력에서 배제된 동안 지방에서 서원 교육과 향촌 자치, 학파 조직을 통해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사림의 분열과 붕당 형성
사림이 권력을 잡은 이후, 내부의 통일성과 도덕성이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정권 운영에 대한 이견과 인사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사상 초유의 정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붕당정치의 시작은 명확히 선조 대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분열된 데서 출발한다. 표면적으로는 인사 문제였지만, 그 이면에는 학문적 계통과 지역적 기반, 정치적 성향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인은 비교적 젊은 사림으로 이상주의적이며 급진 개혁 성향이 강했고, 주로 영남 지역 출신이 많았다. 반면 서인은 연륜이 깊고 신중한 현실주의적 접근을 선호했으며, 기호 지방 중심의 관료들이었다. 이후 붕당은 동인이 다시 북인(광해군 지지)과 남인(인목대비 지지)으로 분열되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며 당파 간 정치적 충돌은 점점 더 격화되었다. 각 붕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념과 정론을 내세웠고, 왕권을 등에 업거나 견제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거나 유지하려 했다.
붕당정치의 본질은 특정 당파가 권력을 독점했을 때 상대 붕당을 철저히 배제하고 숙청하는 데 있었다. 이는 단순한 당파 경쟁을 넘어 '정적 제거'라는 폭력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과 안정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숙종 대에 나타난 ‘환국정치’는 이 같은 붕당정치의 병폐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남인과 서인이 수년 간 정권을 주고받으며 피바람을 몰고 왔다. 특히 경신환국(1680), 기사환국(1689), 갑술환국(1694) 등은 정국의 극단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당쟁 정치의 심화와 조선 사회의 혼란
조선 중기 이후 붕당정치는 본격적인 당쟁의 시대로 접어든다. 단순한 정치 견해 차이를 넘어 권력투쟁과 정책 실패, 민생 파탄 등으로 이어지며 사회 전반의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왕권이 특정 붕당에 편승하거나, 붕당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한 탕평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예를 들어,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 정권은 남인을 철저히 배제하였고, 효종과 현종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반복되었다. 숙종 대에는 남인과 서인이 반복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며 ‘환국 정치’라 불리는 불안정한 국정 운영이 지속되었고, 이는 민심의 피로와 국가 기강의 해이를 초래했다. 붕당정치의 심화는 정치의 본질인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당파의 이익’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며 왕권과 백성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당쟁은 조선 후기의 정국 불안과 외침 대응 실패로도 이어진다.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붕당 간 입장 차이로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고, 이후 18세기 영조와 정조가 추진한 탕평책조차 한계에 부딪히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붕당정치는 조선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림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 실현을 목표로 정치에 참여했지만, 내부의 분열과 정권 경쟁은 조선을 당쟁의 혼란으로 빠뜨렸다. 붕당정치는 정치적 다양성과 정책 경쟁이라는 점에서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도 있었지만, 실상은 권력 독점과 상대 숙청, 국정 마비라는 심각한 폐해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조선의 붕당정치를 통해 정당 간 경쟁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공공성과 책임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정치 역시, 이 역사에서 진정한 교훈을 얻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