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과 궁중생활한반도의 역사는 단순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고려, 조선의 흐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 혹은 그 바깥에 존재했던 ‘사라진 왕국들’ 발해, 후백제, 대가야는 짧은 시간 존재했으나, 독자적인 문화와 외교, 정치 체계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이들의 유산은 지금도 유적과 유물, 지역 전통으로 남아 우리 역사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각 왕국의 건국 배경, 멸망 이유, 문화적 유산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역사 속 또 다른 주인공들을 재조명해 봅니다.
목차
동북아 해양 강국, 발해의 흔적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 고구려의 유민 세력과 말갈족을 중심으로 탄생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단순한 유민의 자치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 질서의 창출이었습니다. 대조영은 당의 공격을 물리친 뒤 동모산에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 국가임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발해가 후고구려가 아닌 ‘새로운 고대국가’로 스스로를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발해는 9세기 초에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포함해 오늘날 남한 면적의 3배에 이르는 땅을 통치하며, 일본과 당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해 국제 외교를 활발히 펼쳤습니다. 특히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당시 당나라 장안성을 모델로 삼아 계획도시 형태로 건설되었고, 당시로서는 드문 5경 15부 체제를 운영하며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행정 체계를 갖췄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고구려의 전통과 당의 문물을 융합한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발해 금동불, 벽돌무덤, 석등 등은 고구려적 요소와 당나라적 미학이 공존하며,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줍니다. 일본 교토의 도다이지 사원에는 발해 사신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발해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0세기 초, 거란(요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나, 발해 유민 상당수는 고려에 귀속되어 고려 초기 국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강원도, 함경도 일대에서는 발해계 지명과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와 발해를 함께 묶는 ‘남북국 시대론’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발해는 단순한 고구려의 후신이 아닌, 독립적 문화권을 형성한 해양강국이었습니다.
후삼국의 난세 속 후백제의 등장
후백제는 892년, 신라의 중앙 통제력이 붕괴되던 혼란한 시기에 군웅할거 양상을 보이던 지방에서 견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는 전라도 완산주(현 전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기존의 신라 귀족 질서에 반기를 든 ‘지방 출신의 새 정치인’으로서 등장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병법과 행정력으로 순식간에 남부 지역을 통합하며 후백제를 견고히 했고, 고려의 왕건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한 축을 이뤘습니다.
후백제의 군사력은 막강했으며, 왕건과의 전투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지역 기반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는 내부적으로 매우 취약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견훤의 독단적 통치와 아들 신검과의 갈등은 내부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견훤은 스스로 아들에게 폐위당하고, 왕건에게 귀순하면서 후백제는 936년 고려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후백제는 백제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시도가 뚜렷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복원에서 출토된 유물 중 일부는 후백제 시기의 유물로 추정되며, 이는 백제 왕실 문화의 잔재를 후백제가 흡수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전주 경기전, 완산 고분군, 견훤산성 등은 후백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현재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견훤은 단순한 반란군 출신이 아닌, 새로운 정치 질서의 창출을 꾀했던 개혁자였습니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지방에서 중앙으로 도전했던 그와 후백제의 역사는 한국사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후백제는 짧은 생애였지만, 분열기 속에서도 지역 주도의 정치, 문화, 군사력을 발휘한 전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철기왕국 대가야의 문화적 유산
대가야는 가야연맹체의 일원으로, 고령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국가입니다. 기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대가야는 독자적인 정치체계를 갖추고 562년까지 존속하며, 가야 문화의 정점이자 최후의 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6세기 무렵에는 신라와의 혼인동맹,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삼국 사이에서 중재자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왕족의 무덤으로, 대형 석곽묘와 철제 갑옷, 투구,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특히 철제 유물은 가야가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당시 대가야가 단순한 군사 집단이 아니라 고도의 생산력을 가진 문명국가였음을 방증합니다. 이는 오늘날 ‘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근거가 됩니다.
대가야는 예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가야금의 유래가 된 ‘우륵의 전설’은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이 신라에 귀화해 음악을 전했다는 내용으로, 가야의 음악 문화 수준이 삼국 못지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금속 세공, 도자기 제작, 문양 장식 등은 후대 신라와 백제의 예술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정교하고 감각적이었습니다.
562년 신라에 병합된 이후, 대가야는 공식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 문화는 지역 전통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령에서는 매년 ‘대가야 체험축제’가 열리며, 지산동 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될 만큼 국제적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야사 복원 작업은 현재도 활발히 진행 중이며, 그 중심에는 대가야가 있습니다.
발해, 후백제, 대가야 이 세 왕국은 짧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긴 역사 속 보물입니다. 이들의 정치, 문화, 기술은 단순한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제는 교과서의 한 줄로 남겨질 수 없는 이 왕국들의 유산을 직접 체험하고 공부하는 것은, 역사를 과거가 아닌 현재로 연결하는 통로가 됩니다. 가까운 박물관 방문, 유적지 탐방, 전통문화 축제 참여 등으로 우리 스스로 ‘사라진 왕국들’을 다시 기억하는 일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