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억압되던 시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현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현 러시아 극동 지역)**로 거점을 옮겨 치열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이 지역은 단순한 피신처가 아닌, 항일 무장투쟁과 외교적 전략이 결합된 독립운동의 핵심 기지였다. 본 글에서는 간도와 연해주에서 어떻게 무장투쟁과 외교 전략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것이 한민족 독립운동의 네트워크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1. 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 무장투쟁의 전초기지
간도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하면서도 청국과 일본, 러시아의 세력권이 맞물린 ‘국제적인 틈새 공간’이었다. 이 지역에는 19세기말부터 조선인 이주민들이 정착해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고,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 기지가 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망명이 아니라 체계적인 무장 조직 결성과 군사훈련을 통해 ‘외부 전선’에서의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광복군총영 등이 있으며, 이들은 중국의 항일 조직과 연대하거나 독자적으로 군자금을 마련해 무기를 확보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했다. 특히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대첩은 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의 정점으로 평가되며, 김좌진, 홍범도, 안무 등 걸출한 지휘관들이 활약했다. 이들은 단순한 게릴라전이 아니라 훈련된 독립군 부대를 기반으로 한 정규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간도는 단순한 거점이 아니라 ‘독립전쟁의 실험장’이자 무장력의 배양지였으며, 이를 통해 독립운동은 점차 국제적인 전선으로 확장되었다.
2. 연해주의 독립운동 - 외교와 민족자치의 교차점
간도와 함께 중요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곳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다. 연해주는 1860년 이후 조선인이 대거 이주하면서 형성된 디아스포라 공동체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발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상대적 관용과 제정 러시아의 쇠퇴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펼칠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은 단순한 무장투쟁을 넘어 민족 자치와 외교 전략으로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조직으로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이 있으며, 이들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핵심은 무장을 넘어 ‘외교’와 ‘행정’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민학교, 민족신문, 교회 조직, 금융기관까지 세워져 실질적인 한인 자치 행정이 이뤄졌으며, 이는 임시정부의 운영 모델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소련 혁명세력과의 협력을 모색했고,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연대를 이끌었다. 연해주는 단순한 해외 망명지가 아니라, 국제 정치의 무대에서 ‘한민족 독립’이라는 의제를 정치화하고 외교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전진기지였다.
3. 무장과 외교의 병행 전략 - 협력과 갈등의 교차로
간도와 연해주는 각각 무장 중심과 외교 중심의 활동 특색을 보였지만, 실상은 상호 연계된 독립운동 네트워크로 유기적으로 작동했다. 무장독립군은 간도에서 전투를 치른 후 연해주로 이동해 재정비를 하거나, 연해주에서 무기를 확보해 간도 전선으로 보내는 식의 전략적 연계가 있었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결된 조직들이 두 지역 모두에 파견되어 명령체계, 군자금, 정보공유 등이 유기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내부의 분열과 외부 정세의 급변은 이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흔들었다. 파벌주의, 이념 대립, 자금 부족, 국제정세의 변화 등은 협력 구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었고, 특히 일본군의 **간도참변(1920)**과 소련의 **고려인 강제이주(1937)**는 조직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큰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 중국 공산당, 소련군, 항일연합군 등과 연대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김일성 부대의 활동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해방 후 북한의 항일 정통성을 주장하는 역사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무장과 외교는 독립운동의 양 날개였으며, 국경을 초월한 협력이 가능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례다.
4. 국경을 넘는 정보와 물자, 그리고 인적 연결망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바로 정보, 물자, 사람을 잇는 넓은 연결망이었다. 한인 상회, 교회, 학교, 언론, 우편망 등은 단순한 공동체 기능을 넘어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기반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한인 교회 네트워크는 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미주 지역까지 연결되며 기부금 모집, 정치적 연대, 교육 활동의 거점으로 작동했고, 독립신문 등 민족 언론은 소식을 전하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연결망은 해외 독립운동의 ‘숨은 동맥’이자 실제적인 물적·정신적 자원이었으며, 독립군의 후방 지원, 유학생의 양성, 외국 언론에의 홍보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또한 국제기구나 외신을 통한 외교적 설득 전략 역시 이 연결망을 통해 조직되었으며, 간도와 연해주는 결국 조선 반도 바깥에서 독립운동이 살아 움직이는 통로였던 셈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국경을 초월한 민족 연대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분단 이전의 통일적 민족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맺음말
간도와 연해주는 단순한 망명지가 아니라, 한민족이 압제에 맞서 독립을 조직적으로 모색한 ‘해외 항일투쟁의 전략기지’였다. 이 지역에서 이뤄진 무장투쟁은 독립전쟁의 실험장이 되었고, 외교 전략은 국제사회에 한민족의 존재와 정당성을 알리는 통로가 되었다. 국경을 초월한 연대와 정보 네트워크는 오늘날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와 국제 연대의 시발점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오늘날 간도와 연해주 지역은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적 독립운동이 실제로 전개되었던 살아있는 역사 현장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 유산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모색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간도와 연해주의 역사는 국경에 갇히지 않은 독립운동, 이념을 넘어선 민족 연대의 실천적 기록이다.